탐십대
(탐색기에 다시 접어든 30대)
A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졸업 19’
자기소개 부탁해요.
탐색기에 다시 접어든 30대라고 할게요.
요즘 무엇을 하며 지내시나요?
영상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친구들이나 외주를 통해 알게 된 분들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영상 음악 일을 받아 작업하고 있어요. 음악 일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서, 생계를 위한 촬영 일도 가끔 하고 있고, 최근에는 IELTS 학원을 등록해놓고 바빠져서 못 가고 있네요.
먼저 미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어릴 때 사생대회에서 늘 상을 타곤 해서 미술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좀 더 커가면서는 자동차를 좋아해서 자동차 디자이너를 장래 희망으로 생각했죠. 그래서 미대입시를 했고 본가인 C 시에서 가까운 대학교의 디자인 학부에 입학했어요. 학교생활은 재미있었지만, 과에서 자동차 디자인을 다루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내내 살아온 C 시를 벗어나 서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서 반수를 했어요. 결국, 서울에 있는 A 대학교 산업디자인 과에 입학했죠.
의외로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꿨었군요. 대학교에서는 어떤 학생 이었나요?
두 번째 학교생활이라서 인지 친구들과 노는 건 아주 익숙하게 잘했어요. 하지만 1학년 때는 전공 기초 수업이 다수여서 더 재미있는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죠. 그래선지 입학 이후로 3학기 연속 학사경고를 맞았어요. 그러다 보니 졸업전시는 재작년에 했지만 부족한 학점을 채워야 해서 졸업은 더 늦어졌네요.
졸업은 시각디자인 과로 했잖아요. 산업디자인 과에서 시각디자인과로 전과한 이유는 무엇이었어요?
학교에 다니면서 자동차를 그리거나 만들고 싶어 했던 건 좀 더 어릴 때의 장래 희망이었다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되었어요. 미래 삶의 방향을 벌써 한 가지로 고정하기엔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이미 잠깐의 대학생활을 했었고, 서울에서의 다양한 경험들로 인해 세상에 흥미로운 분야가 많다는 걸 알아가고,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기도 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평소 제가 좋아하던 미디어 아트 작가가 시각디자인과에 교수로 온 걸 알게 됐어요. 좀 더 다양한 분야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 반, 그 교수님의 수업을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 반으로 전과하게 됐어요.
가장 기억에 남은 수업이 있다면요?
그 교수님의 수업이었어요. 2학년 2학기에 주중 하루에는 종일 그 교수님의 전공 수업 2개를 듣고, 3학년 수업 1개를 청강했어요. 새로운 미디어의 예술적 활용과 인터랙티브 스크립팅을 다루는 수업이었고, 아두이노, 프로세싱 같은 걸 다뤘죠. 평소 관심이 있던 영역이어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오전 수업을 마치고 수원에 있는 부품점까지 가서 부품을 사와 오후 수업에 출석하고, 수업 후 학교 근처 카페에서 남아서 배우고, 크리틱도 듣고요. 그리고 교수님의 작업이 설치된 장소에 초대해 주셔서 관계자들을 소개해주던 것도 좋은 경험이었죠. 아쉽게도 군대를 다녀오니 교수님이 학과를 떠나신 후였어요. 만약 쭉 학교에 계셨다면, 지금쯤 저도 좀 더 밀도 있게 미디어 아트 관련 분야에 대한 경험을 쌓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아쉬울 수도,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작업하게 되어 다행일 수도 있네요. 그럼 졸업전시는 어떤 작업을 했어요?
평소 ‘나는 디자이너 타입은 아니야’하고 입버릇처럼 흘리고 다니다가, 그런데도 ‘나는 디자인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였는지, 미대 학부생 최후의 에고 트립을 하고 싶었는지, 졸업전시에 희한한 그래픽⋅설치 작업을 만들게 됐어요. 그래픽 작업물을 포스터로 출력해서 신디사이저, 드럼 머신과 믹서 등 음악 하드웨어를 함께 전시했어요. 사실 전시장에서 공연을 같이하고 싶기도 했는데, 환경도 썩 어울리지 않고 시간도 많지 않아서 못했어요. 돌이켜보면 제가 처한 상황을 자연스럽게 정리해서 보여주는 작업이 아니었나 싶어요. 당시 제 고민을 갈무리해서 전시장에 가져다 놓은듯한 느낌이었죠.
졸업 전시 이후에는 어떤 일을 했어요?
학교에서 영상 소모임을 하기도 했고, 산디과 친구들에게는 영상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친구다 보니 학교 다닐 때부터 영상 외주를 소소하게 했어요. 졸업 전시 즈음에는 학교 친구들과 함께 작업실을 열었고요. 졸업 전시 후엔 교수님을 통해 규모 있는 전시의 오프닝 영상 연출을 맡았어요. 영상을 만들다 보니 필요하게 된 음악도 만들고요. 그렇게 관성이 붙어 계속 크고 작은 영상과 영상 음악 작업을 하며 지내던 와중에 그해 9월 쯤 강변북로에서 교통사고가 났어요. 제품 영상과 사진을 찍기 위해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택시를 타고 가는 길이었죠. 3중 추돌 사고였는데 당시에는 몰랐지만, 경찰서에서 뒤 차 블랙박스 영상을 보니 간발의 차로 생사를 넘나들었더라고요. 그 사건을 계기로 ‘언제 죽을지도 알 수 없는데 항상 뒤로 미루어 뒀던 음악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해오던 영상 외주 일에 확신도 없고, 혼자 꾸려가다 보니 힘에도 부치던 시기였거든요.
크게 다치지 않아서 참 다행이면서도 진로에 대한 생각이 바뀐 커다란 계기네요. 그럼 본격적으로 음악 이야기를 해볼까요. 음악을 처음 시작한 건 언제인가요?
고등학교 때부터 힙합 비트메이킹에 관심이 있어서 이때부터 음악 비슷한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대학교 때부터는 학과 영상제나 공동 창작이라는 공연을 만들 때도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 학교 밴드 활동도 했고요. 돌이켜보면 무엇을 하던 항상 음악이 필요한 부분에는 나서서 하거나 누군가 저를 찾았던 것 같아요. 음악 하는 건 디자인할 때에 비해 밤을 새워도 늘 정신적인 피로감이 없었어요. 작업할 때 시간도 정말 빨리 가고요. 영상 작업을 하게 된 것도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어릴 때부터 뮤직비디오를 많이 찾아보게 되고, 그러다 보니 영상도 만들게 된 것 같네요.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한건 언제부터에요?
앞서 말한 교통사고 이후에, 음악으로 진로를 고민하게 됐어요. 원래 좀 더 마이너한 분야의 전자음악을 늘 좋아하고 만들어 왔지만, 수입 등 경제적인 여건을 고려하면, 당시 생각에는 K-POP 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요. 그러다 SNS 광고를 통해 작곡 클래스를 알게 되어 수강했어요. 반년 정도 되는 코스인데 작곡을 배워서 만들면 홍보와 판매를 도와 작곡가로 데뷔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거였죠. 음악을 하면서 항상 비전공자 콤플렉스가 있던 터라 좀 더 배워보기 위해서 수강했어요. 덕분에 프로로서, 음악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에 대한 진지함과 감도 생기고, 좋은 선배 작곡가 분들과 동료들도 많이 알게 됐죠. 클래스를 마치고서는 베이징에서 열린 송캠프에 참가하는 기회가 있었어요. 송캠프는 개발자들이 해커톤을 하는 것처럼, 짧은 기간에 작곡가들이 서로 모여서 협업해서 곡을 만들어 나가는 시스템인데요. 경력이 쟁쟁한 해외 음악가들과 함께 협업하고, 여러 유명 작곡가를 만날 수 있는 뜻깊은 자리였어요. 캠프를 마칠 즈음에 캠프에서 만들어진 작업물들을 다 같이 듣는 세션이 있었는데, 캠프 수퍼바이저가 제 곡 중 하나를 꽤 앞 순서에 트시더라고요. 보통 괜찮았던 결과물들을 앞에 두고 듣는다고 들어서 굉장히 뿌듯했죠. 이후 피드백도 좋은 편이어서 ‘내가 프로들 사이에서 음악을 만들어도 경쟁력이 없지 않고, 계속해 봐도 좋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죠. 한국에 돌아와 작업실을 얻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어요.
K-POP 작곡을 직접 해보니 어땠어요?
업계에 뛰어들어 직접 만들어보니, 환경이 디자인할 때보다 더 어렵더라고요. 디자인 외주는 어쨌든 작업이 끝나면 크든 작든 작업비를 받는데, 대중음악은 결과물이 선택되지 않으면 수입을 만들 수 없는 구조였어요. 팔리지 않으면 작업했던 시간이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당장 받을 수 없었죠. 그렇게 반년 정도 쭉 시도해 보다가, 유명 기획사나 방송사와 좋은 기회들이 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두 무산됐어요. 시간을 들이는 것에 대한 당장 보상이 없고, 결과에 대한 확실성 없이 계속하다 보니 힘이 많이 빠지더라고요. ‘내가 최선을 다했었나? 더 인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던 중에,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현재 상태를 버티려면 이 분야에서 성공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K-POP을 만들어서 성공한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고 어색하더라고요. 그렇게 K-POP 작업은 무기한 중지 상태로 두기로 마음먹었고, 좀 시간을 가지며 다른 방법들을 궁리해보기 시작했죠. 실만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일단 귀감이 되는 훌륭한 멘토를 찾게 되었고, 대중음악을 만드는 친구들이 많이 남았고요. 어쨌든 음악을 좀 더 팔릴만한 퀄리티로 다듬어 낼 수 있는 기술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저 또한 화려한 면만 보다 보니 그런 사실은 전혀 몰랐는데요. 생각이 많았겠어요. 어떤 고민을 했어요?
고정 수입 없이 불안정한 상태를 2년 정도 지속하다 보니, 월급 받는 생활을 좀 해봐야겠더라고요. 그래서 포트폴리오도 정리해보고 취업 준비를 시작했죠. 취업한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도 많이 듣고요.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다 보니 그동안 했던 일들의 네임밸류들이 꽤 팔릴 만하지 않나 싶고, 여러 가지 만들어내고 홍보했던 경험들이 광고 회사의 색깔과 맞지 않을까해서 광고 회사 지원을 생각해봤어요. 예술 쪽으로 전시 기획하는 회사에서는 면접도 한번 봤고요. 그런데 그럴수록 ‘진심으로 그 일을 하고 싶은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회사도, 저도 속이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취업은 나중으로 미뤄뒀어요.
스스로 속인다는 표현이 인상깊네요. 그나저나 인터뷰 시작 할 때 IELTS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요, 어떤 이유에서 하게 된거에요?
2010년에 입학을 하고 계속 서울에 있었는데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동안 쌓였던 서울살이의 우울함이 점점 짙어졌어요. 여러 사람을 만나 즐겁게 지내고, 이것저것 일하느라 겉으로는 몰랐지만, 속에는 그런 감정이 쌓여가고 있었나 봐요. 그래서 작년 겨울에 서울을 잠시 떠나있을 겸, 서울 밖에서는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 물어볼 겸해서 다양한 이유로 외국에서 지내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러 유럽에 갔어요. 여행 와중에 암스테르담과 런던에서의 경험이 기억에 많이 남는데요. 두 도시 모두 전자음악에 대한 관심도나 접근성이 매우 높았어요. 역사나 씬 자체도 오래되었고요. 레코드 스토어도 규모가 크고, 전문화되어 있어서 근시일 내에 제 음악이 담긴 바이닐을 여기 놓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이런 환경의 혜택을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냥 살든, 공부나 취직을 하든 일단 지내려면 공식적인 자격이 있는 편이 수월할 것 같아, IELTS를 준비하게 되었어요.
외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려고 해요?
궁극적으로는 사실 음악에만 집중하고 싶은데, 어디서나 생계는 꾸려가야겠더라고요. 30대에 들어선 나이에 아무 결과도 없는 시기를 다시 견디기는 힘들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일단은 외국 소재 대학원의 UX나 데이터 시각화 석사를 지원해보려 찾아보고 있어요. 다시 영상을 할 생각은 없고, 디자인으로 직업을 구하려면 그나마 이런 분야들이 수요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미디어 아트에 관심이 있던 시절부터, 전자 음악을 만들 때도 늘 인간⋅기계 상호 작용에 관심이 있던 터라, 이런 전공들이 공부하고 직업을 구하는 데에서 저와 맞을 것 같기도 했고요. 외국에서 공부하고, 일자리를 구하는 것과 동시에 음악은 계속 만들려고 해요.
디자인을 전공한 것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어요?
주변에 디자인을 전공한 좋은 친구들이 음악이 필요할 때 일을 주는 점이 일단 좋고요. 대중, 상업 음악을 만들 때도 보통 클라이언트와 요구사항이 있는 일이라서, 프로세스에 적응하기 편했어요. 디자인 과에서 지내면서 주위 환경에 영향받고, 연결된 미감을 흡수하는 것도 음악 만드는 것에 녹아나지 않을까 싶네요. 하지만 때로는 디자인의 영향을 차단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은데, 마음 한 편에 배우고 생활했던 가닥이 있다 보니 음악과 디자인이 밀접하게 연결된 무언가 만들자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계속한 것 같아요. 물론 이런 방식으로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한테는 잘 작동하는 방식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지금은 음악 할 땐 그 고리를 끊고 더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에 에너지를 집중하자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했어요.
미래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일단 올해 가을 안으로 개인 작업들을 정리하고 다듬어서 EP 정도의 볼륨으로 발매할 계획이에요. 작년 가을쯤에는 처음으로 관심 있는 분야의 관계자분들과 공연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공연 후에 그 분들에게 좋은 피드백을 들어서 뭔가 더 만들고 들려줘야겠다는 용기가 다시 생겼죠. 그래서 일단은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음악을 만드는 저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널리 알리려고 해요. 그리고 제가 만들고 싶은 음악이 보통은 클럽에서 틀게 되는 용도의 음악들이라 디제잉도 시도해보려고요. 가까운 미래의 꿈은 좋아하는 아티스트들과 같이 무대에 오르는 건데요. 언젠가 음악 매체에 오늘처럼 제 인터뷰가 실리면 좋겠네요.
다른 선택을 주저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혹은 과거의 자기 자신에게 조언 부탁해요.
고민하는 시간 자체가 삶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요즘 죽기 전까지 인간이 과연 정말 ‘안정된 상태’를 마련 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상황이라고 해도 사람이 고민은 있기 마련이니까, 고민하는 과정 자체에 부담을 갖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 개인적으로는 유목민 마인드를 가지고 고정되지 못한 삶에 스트레스를 덜 받으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제 경우에 삶을 남들과 비교하는 것도 좀 과도했는데요. 요즘에 들어서야 남들과 비교를 덜 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돌아보니 그게 결국 발목을 묶는 큰 스트레스였어요. 제 음악을 릴리즈 하는 걸 계속 주저했던 게 결국 다른 사람들과 줄 세워지게 되고, 한번 내보내고 나면 통제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두려웠던 거죠. 하지만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야 다음 스텝이 열리는 건데, 그동안 좀 소극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그때 스스로 모습에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에게 맞는 무언가를 하면 후회도 덜 남지 않을까 싶어요.
2019년 6월 13일 성산동 한 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