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정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졸업
'18
라니앤컴퍼니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해요.
저는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를 13학번으로 입학한 고연정입니다. 5년 동안 학교에 다니다가 올해 2월에 졸업했고, 이제 사회생활 시작한 지 정식으로는 2개월 됐어요.
먼저 미술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디자인 과에는 어떻게 입학했는지 궁금해요.
미술 시작을 얘기하자면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겠네요. 9살 즈음 스케치북 한 권에 만화 연작을 그려서 언니를 보여주곤 했어요. 언니는 제가 만든 캐릭터를 좋아하는 유일한 독자였죠.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 만들곤 했어요. 자매의 놀이였죠. 부모님도 그런 모습을 보고 어린이 미술 학원을 보내주셨고, 그 후 취미미술학원을 쭉 다녔어요. 그리고 중학교 때 그래픽 툴을 혼자 익혔어요. 교회 행사의 포스터, 리플렛을 직접 만들고, 인터넷에도 올리고 그랬어요. 레퍼런스도 많이 보고 모았죠. 스트릿 패션이나, 해외 디자인 사이트들이요. 그거 모으는 게 큰 낙이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크리에이티브디렉터라는 직업을 알게 됐어요.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지금은 우아한형제들에 있는 한명수 디자이너를 봤어요. 그 당시에는 SK커뮤니케이션즈에 있었는데, 브랜드에 스토리를 부여하고 일관된 룩을 만드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 보이는 거에요. 디자인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그 직업이 하는 일이 재밌어서 되고 싶었죠. 그리고는 무작정 한명수 디자이너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고2 때 미술학원에 혼자 상담을 받고 부모님에게 통보했어요. 미대 갈 거라고.
제가 인터뷰한 분 중 가장 디자인을 일찍 접하고 공부한 것 같아요. 그럼 그렇게 입학한 대학교는 어땠나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문화권에 갑자기 ‘퐁당’ 빠진 것 같은 경험이었어요. 성인이 되면서 경험하게 되는 많은 변화들이 있는데 거기에 디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까지 더해지니까 매우 혼란스러웠어요. 입학하자마자 컴퓨터로 멋진 작업을 할 줄 알았는데, 미술 교육을 다시 받는 거에요. 크로키하고, 입체 수업하고. 그게 적응이 안 되고 불만이었죠. 그래도 새로운 사람 만나고 새로운 지식도 알게 돼서 좋았어요. 수업 중에는 타이포그래피가 가장 어려워서 기억에 남아요. 타이포그래피를 잘하는게 멋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수업에서 알려주는 규칙을 왜 따라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거에요. 그래서 질문을 던지면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규칙이야.’, ‘느끼면 돼’라는 대답을 들어서 더 어려웠어요. 그러다 교환학생을 가서 타이포그래피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알게 되었죠.
교환 학생 얘기를 좀 해줄래요?
교환학생은 1년 휴학을 마치고 복학한 3학년 2학기에 루체른으로 갔어요. Noel Leu 라는 타입 디자이너가 나온 학교인데, 그 분을 몇번 만나보고 스위스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루체른을 선택했죠. 설레는 마음으로 떠나기는 했지만, 사실 교환 학생 때를 떠올리면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힘들었던 기억이 제일 먼저 나네요. 당시 일과 외주를 병행하고 있었고, 다른 문화와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었어요. 수업 시스템이나 수강 인원 등 여러모로 한국과는 많이 달라서 적응하는데에만 한 학기를 다 보낸 것 같아요. 수업 중에서는 도착해서 가장 처음 들었던 타이포그래피 수업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독일어 수업에, 조판도 독일어로 해야 해서 정말 난감했죠. 저는 타이포그래피 기초가 정말 약했어서, 첫 과제로 말도 안 되는 그리드를 짰어요. 그걸 본 교수님이 차근차근 알려주셨는데 어렵다고 생각했던 타이포그래피가 사실 어려운 게 아닌 거에요. 그때부터 타이포그래피의 재미를 알게 됐죠. 교환학생 학기는 정말 힘들었지만, 디자인을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을 배울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 디자인과 창작의 재미를 다시 느끼게 된 계기가 됐죠.
저도 졸업전시를 앞두고 고민이 많은데요. 졸업 시기에 고민했던 게 있나요? 졸업 전시는 어떻게 했나요?
졸업전시 아이디어는 많았는데 막상 실행하려고 하니까 어떻게 시작할지가 막막한 거에요. 교수님은 일단 뭐든 해보라고 하시는데, 막상 그렇게 작업하고 나서 보면 마음에 안 들어서 중도에 포기하고, 작업에 집중 하지 못했어요. 학점도 채우고 졸업준비위원회 일도 하느라 바쁘긴 했는데, 무엇보다 제 작업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아요. 학교에 다니면서 다양한 분야를 배우려고 노력해왔는데, 그래서 잘하는 게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여름방학 때 무작정 호주로 떠났어요. 여행하는 동안 인스타그램, 외장 하드 안을 쭉 봤죠. 제가 무엇에 관심 있는지 찾아보려고요. 그랬더니 길가에 있는 간판과 웃기고 촌스러운 조형물, 안전시설물을 많이 찍었더라고요. 그걸 모아보기로 했어요. 사진을 다 모아보니 도시라는 주제로 묶이더라고요. 원래는 졸전이니까 힘을 줘서 노트도 만들고, 굿즈도 만드는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전시를 만들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시간도 부족하고, 작업과는 상관 없는 보여주기용 같아서요. 결과적으로는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 하는 일 어떤 일이고, 어떻게 하게 되었나요?
4학년 때 디자인매니지먼트라는 이름의 브랜딩 실무 수업을 처음 들었어요. 팀 작업으로 남성 그루밍제품 플랫폼을 만들어서 서비스를 기획하고, 제품에서부터 룩까지 만들었죠. 저의 부족한 부분을 다른 팀원들이 보완해주는 게 좋았어요. 정말 열심히 기획하고 최종발표도 직접 했죠. 그때 심사위원으로 지금 회사 대표님이 오셨는데, 제 모습을 좋게 보셨는지, 인턴을 제안하셨죠. 8월부터 인턴을 시작해 졸업 전시하면서도 계속 일을 했어요. 라니앤컴퍼니라는 회사인데, 브랜드가 의뢰 하는 BI 등의 전략을 수립하고 브랜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반적인 것을 컨설팅하는 곳이에요. 저는 상품기획, 공간 기획과 같은 일을 맡고 있고 이제 1년 차가 되었어요.
기획자로 계속 일하고 싶은 건가요? 어떤 일을 하고 싶어요?
디자인은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사이에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목적이고, 순수 미술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의미가 다변하는 게 자연스럽죠. 그래서 디자인은 쓰임이 분명해야 하고, 어떻게 사람들을 움직이고,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할지를 분명히 하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하는 거 같아요. 이걸 순수 미술과 디자인의 차이라고 볼 수 있죠. 저는 다양한 분야를 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이런 순수 미술과 디자인 사이에서 디자인에 가까운 작업도 하고, 순수 미술에 가까운 작업도 하면서요.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도 디자인이지만 왜 그 결론이 되어야 하는지 논리를 세우는 과정도 디자인이죠. 결과물을 잘 만드는 것도 좋지만, 저는 그것보다는 기획을 좀 더 치밀하게 세울 수 있으니, 그쪽 일을 더 잘할 것 같아요. 다만 딱 잘라서 결과물만 만들래, 기획만 할래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디자인 외에 관심사가 있나요?
요리가 재밌어요. 요리도 보면 디자인이랑 되게 비슷해요. 어떤 수준의 재료를 가지고 와서 어떤 방법으로 조리해서 어떻게 그릇에 담아낼지의 전반적인 과정을 기획해서 만들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거니까요. 다만 구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만들어지고 전달되기까지의 과정이 디자인보다 훨씬 짧은 것 정도가 다르죠. 저에게 있어 미식은 오감을 만족하는 즐거운 경험이에요. 디자인보다 더 원초적인 점도 재밌죠. 지금 당장 ‘요리를 더 배워봐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기회가 된다면 외식 사업 같은 걸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꼭 할거에요. 오감을 자극하는 요리를 편안하고 좋은 분위기에서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이고 싶어요.
디자인한다면 어떤 일을 할 것 같고, 안 한다면 어떤 일을 할 것 같은지?
디자인한다면 식당을 열거에요. 식당을 제가 디자인할 수 있잖아요. 식기나 조명, 음악까지도 다 진두지휘하고 포스터도 만들어 붙이고요. 커져서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 수도 있고요. 만약 디자인을 안 한다면 배관공이나 용접공을 할래요. 어디든 꼭 필요한 일이잖아요. 그리고 딱 근무시간에만 일하고 집에 가서는 마음 놓고 쉴 수 있으니까요. 다른 일이라면 육가공해체도 해보고 싶어요. 힘들긴 하겠지만, 매력적인 것 같아요. 디자인은 일과 개인 시간이 좀 애매한 것 같아서, 일을 일로서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나에게 투자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좋겠네요.
디자인한다면, 식당을 한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인 것 같아요. 디자인한다면 당연히 디자인분야에서 일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럼 디자인 과에서 얻은 건 무엇인가요?
돌멩이를 보고도 새로운 inspiration이나 solution을 생각할 수 있게 된 거요. 매출과 경영데이터 등 수치만으로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사소한 물건을 보고도 현상을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사회에 나와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게, 제가 좀 더 다각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거였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게 아예 불가능하더라고요. 어떤 현상이나 문제를 어떻게 해야 체계화할 수 있는지를 배우니까 어떤 일을 하던 더 창의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안녕, 디자이너’에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학교 다닐 때도 작가적인 디자인과 기업적인 디자인을 이분해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게 과연 정확하게 갈라지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예술가 같은 디자인을 하니까 작가적인 디자이너, 기업적인 디자인을 하니까 UX/UI 디자이너, 이렇게 나누는 건 디자이너를 오퍼레이터로 한정해서 생기는 문제 같아요. 디자인 일을 하는 사람, 디자인 일을 안 하는 사람으로 나누는 것도 이런 이분적인 사고가 이어진 것 아닐까요? 디자인 과를 졸업한 사람은 디자인적인 감각이 있으므로, 무엇을 하던 더 감각적이고 능동적으로, 어떤 레이어를 더 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프로젝트를 후배들이 읽으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저의 신입생 때를 생각하면,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통로는 술자리에서였어요. 내용도 신세 한탄이 대부분이었죠. 이렇게 진로에 대한 담론이나 디자인 고민에 관한 이야기를 일찍 봤다면 훨씬 도움이 많이 됐을 거 같아요.
2018년 5월 11일 할리스 상수역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