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훈영
연세대학교 생활디자인학과 졸업 ‘21
지금은 프로덕트 매니저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터뷰 신청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윤훈영이고, 연세대 생활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방황 끝에 지금은 스타트업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어요.
미술을 시작하게 된 건 언제고, 왜 하게 됐어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건 초등학생 때부터인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주위에 똑똑한 친구들이 많았어요. 학업 영역에서는 노력해도 더 잘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유일하게 칭찬받았던 게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였어요. 생각해 보면 엄청난 재능이 있던 건 아닌데, 좋아하니까 더 잘하고 싶고, 또 많이 하면서 만들어진 결과였던 것 같아요. 처음 만난 효능감이 계기가 돼서 미술을 좋아하게 된 거죠. 입시 미술을 해보지 않아서 평가받는 미술을 해본 적이 없는데, 하고 싶은 것들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서 어떠한 해방감을 느꼈어요.
디자인과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원래 입시 미술을 하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공부 포기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어요. 그나마 건축 전공이 제가 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권유를 해주셨어요. 그렇게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에서 2년 정도 공부를 했는데, 해보고 나니 공간 디자인에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달았죠. 원래 해보고 싶었던 시각디자인을 다시 해보자고 생각해서 연세대학교 생활디자인학과로 편입하게 됐어요.
대학교에서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존재감 없는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수업을 열심히 듣지도, 성적이 좋지도 않았어요. 조용히 하고 싶었던 것들을 했죠. 원체 주어진 일, 시키는 일을 묵묵히 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이걸 왜 해야 하는 걸까?’, ‘이걸 이런 식으로 하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의문이 많은 반골수라고 할 수 있죠. 내향적인 편이라 친구들이 많지도 않았고, 혼자서 뭔가 하는 걸 좋아했어요. 하고 싶은 거에 몰입해서 하곤 했는데 팝업 식당같이 주로 학업 외적인 거였죠. 결과물을 만들고 나면, 다들 ‘어? 너 이런 걸 하고 있었어?’ 하는 반응이 많았어요.
대학교 때 들었던 수업 중 기억 남는 수업과 활동이 있나요?
인터랙션 디자인 수업에서 학기 말 과제로 DDR 같은 게임을 만들었는데, 처음으로 제대로 된 팀워크를 경험해 봐서 기억에 남아요. 저는 주로 기획을 담당했는데, 컴퓨터공학 전공 팀원이 뚝딱뚝딱 코드 작성하는 게 무척 신기하더라고요. 팀원 각자가 맡은 부분을 잘 해냈고, 각자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했던 좋은 경험이었어요. 이때 ‘혼자 일하는 것도 좋지만, 각자의 전문 영역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하는 것도 재밌는 일이구나’라는 걸 깨달았죠.
대학교 때 디자인 외에 관심있던 다른 분야는 무엇인가요?
영화 관련 수업을 들으면서 영상 매체로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해서 영화에 관심이 생겼어요. 학교 단톡방에 있는 영화 미술감독을 구하는 글에 무작정 지원하기도 했어요. 영화 현장에는 예측 불가능한 게 많고 직접 해내야 하는 것들도 많더라고요. 정해진 예산과 기간 안에서, 최고의 아웃풋을 만들어 내는 일이 어렵고 열악했지만 재밌었어요. 4학년 때는 별생각 없이 친구와 같이 경영학회에 들어가서 비즈니스 이론, 케이스 스터디, 기업 협력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면서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법 등 많은 것을 배웠어요. 이때부터 스타트업과 IT산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졸업을 앞두고 가장 고민하던 것이 있었나요?
저는 사실 대학 수업에서 디자인을 배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디 가서도 디자인을 전공했다고 잘 말 안 하는 편이에요. 왜냐면 생활디자인학과는 의류, 제품, 시각 이렇게 세 가지 트랙이 있는, 어떻게 보면 약간 잡과인데요. 워낙 다양한 수업들이 있다 보니까 뾰족하게 특정 도메인의 디자인 전문성을 키우는데 초점이 맞춰져있지 않았고, 그래서 약간의 갈증이 있었어요. 누군가가 저에게 ‘어떤 디자인 전공했냐?’ 물을 때도 딱 대답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사실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을 대학생 때 진지하게 해보지 않았어요. 졸업할 때가 돼서야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어요. 참 순진했고 준비성이 없었죠.
졸업 이후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해 오셨나요?
졸업할 즈음 주변 친구들이 인턴을 하고 나서 그다음에 신입으로 일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마지막 학기에 부랴부랴 인턴을 시작하면서, 비즈니스 세계를 배우게 됐어요. 처음에는 글로벌 대기업에서 그로스 인턴을 8개월 정도 했고, 글로벌 스타트업에서 다시 사업 개발 인턴을 했어요. 그다음 B2B SaaS 스타트업에서 정규직으로 1년 정도 그로스 마케터로 일을 하고, 퇴사 후 AI에 꽂혀서 AI 부트 캠프를 한 6개월 정도 다녔어요. 그 후에 많이 고민했는데, AI 기술을 활용하는 회사에서 일하면 그래도 지금까지 해왔던 여러 직무가 연결될 수 있는 일일 것 같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AI 관련 프로덕트를 만드는 PM이 되어서 일한 지 7개월이 됐어요. 업무 외로는 스터디모임장, 에어비엔비, 스타트업 마케팅 외주, 과외, 커뮤니티 빌딩 등 다양한 사이드프로젝트를 해 왔어요. 그리고 다양한 관심사들에서 파생된 것들로 여러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보기도 했죠. 다양한 수익 파이프라인을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왔던 것 같아요.
정말 다양한 업무를 해오신 것 같은데요. 지금 하시는 프로덕트 매니저업무는 만족하시나요?
지금까지 해봤던 직무 중에서는 제일 재미있어요. 디자인할 때는 그 영역 안에서만 일했다면 지금은 디자이너, 개발자와 협력해서 큰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만들 수 있어요. 더 큰 그림을 그리는 일들을 할 수 있죠. 사실 지금도 매 순간 시시각각 불확실성에서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어요. PM이라는 직무도 ‘제 천성과 잘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어떨 때는 ‘매니징하는 거에는 소질이 없는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하는 게 있다면 저는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고 ‘전문 분야가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더 큰 임팩트를 줄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하며 큰 그림을 그리는 거를 되게 좋아하는 사람이다’라는 거예요.
업무 외의 일도 궁금한데요. 서울크리에이터 클럽은 어떤 이유로 시작하게 되었나요?
큰 집에서 살고 싶지만, 비싼 주거비를 해결하기 위해 대학교 때 친구와 함께 살게 됐어요. 대학교 때 재미있었던 포인트들을 사회에 나가면서 잊고 지내게 됐는데, 그 시절이 좀 그립고 갈증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퇴근 후 삶이 좀 더 재미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서로의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고, 모임을 할 때 콘텐츠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죠. 그렇게 몇 가지 파일럿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진행해 봤어요. 함께 단편영화 찍었던 친구들과 영화를 보는 ‘영화클럽’, 실행력 높은 친구들이 목표를 세우고 트래킹하는 모임 ‘Do action club’, 일요일에 다 같이 책을 읽는 모임인 ‘일요 북클럽’ 등을 했죠. 모임이 새로운 영감을 주는 것을 느끼면서, ‘본격적으로 커뮤니티를 만들어야겠다!’라고 결심하고 계속해 오고 있어요.
디자인과를 나와서 지금 하는 일에 어떤 점이 도움이 되는지, 혹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궁금해요.
생각하는 걸 남들이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이게 놀랍고 멋진 스킬셋이라고 믿어요. 남들을 설득하거나 의사결정에 시간과 에너지를 덜 써도 되는건데, 그러면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해나가는 본질적인 것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면,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건 먼저 시작해보고, 실패해보고, 레슨런을 통해 수정해나갈 수 있기도 해요. 저는 이런 스킬셋이 있어서 실행에 주저함이 없고, 어떤 일이든 Go-getter mindset으로 임할 수 있었어요. 예전 회사에서 마케터로 일할 때 노코드 툴로 블로그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어요. 팀 내 리소스가 없던 차에, 직접 배워서 만들겠다고 제안했고, html/css 개념을 한땀한땀 직접 만들어보면서 익혔는데요. 가설을 증명하는 방법을 세우고, 그 가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내면, 그 때부터 부여받은 리소스로 전문적인 사람들과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요즘 하루는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일과가 궁금해요.
유연 근무제인 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일어나는 대로 출근을 해요. 선정릉을 지나쳐서 걸어서 출근하는데 강남이지만 강남 같지 않은 곳이라 기분이 좋으면서 묘해요. 점심엔 도시락을 먹고 오후 product scrum에서는 전반적인 제품 출시 타임라인과 구성원들의 작업 현황을 체크해요. 남은 시간엔 서비스 데이터를 분석해 1-pager를 쓰죠. 제품 전반을 다 챙겨야 하므로 운영성 업무도 하고 있어요. 퇴근 후엔 약속 없으면 주로 헬스장을 가고요. 집에 와서는 함께 사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회사 일이 남았을 땐 일도 잠깐 하고, 다음 날 도시락을 챙겨요. 요즘 건강한 식사에 관심이 많아서 점심 도시락을 직접 싸고 있거든요. 매일 저녁 우당탕탕 주방에서 다음 날 점심을 준비하는 게 재미있어요. 같이 사는 친구 도시락도 함께 준비하는데 ‘오늘 도시락 너무 맛있었어!’라는 칭찬을 들으면, 더 맛있는 도시락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럼 또 메뉴를 연구하게 되더라고요. 이런 순간들이 무척 소중해요.
지금 가지고 있는 꿈이 있나요?
제 주변엔 정말 다양한, 자기다운 인생을 사는 친구들이 있는데 꿈을 이루는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기꺼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제 꿈이에요. 꿈이 목표라면 삶의 태도는 꿈을 성취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생각하는데 추구하는 삶의 태도는 ‘걷지 않고 뛰는 삶’이에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에 보면, ‘하나하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 나가는 것.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 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내 묘비명엔,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그리고 러너.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고 적어지길 바란다.’라는 내용이 나와요. 하루를 살더라도, 저 자신에게 솔직하고, 마음이 동하는 것, 제가 생각하는 가치를 만드는데 있어서 주저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그리고 올해 안에 책도 써보고 싶고요.
디자이너가 아닌 진로 선택을 고민하고 있는 후배에게 조언 부탁드려요.
사실 전공을 살린다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삶은 사실 늘 새로운 것들을 배워나가는 것의 연속이잖아요. 대학에서 전공은 4~6년의 배움인데, 전공을 안 살린다고 한들 크게 의미가 있을까요? 특히 커리어 초반은 언제든지 용기와 의지만 있다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전공 외에 내가 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이 멋진 것 같아요. 한가지 더 말해주고 싶은 것은, 나중에 디자인이 그리울 때, 다시 디자이너가 돼도 된다는 거예요. 원래 마음이란게 이랬다저랬다 할 수 있잖아요. ‘현재’의 결정과 마음이 중요한 거죠. 막연하게 느끼는 그 두려움은 사실 실체가 없는 두려움일 때가 더 많아요. 실패에 대한 고민 때문에 실행이 망설여진다면, 생각보다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꼭 해주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어떤 집단에 속하느냐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서울 크리에이터 클럽을 지속하는 이유도, '스스로 나 다운 삶을 만들어나가고 싶은' 사람들로 제 주변을 채우고 싶어서예요. 그런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제가 유난하거나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거든요. 내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준거 집단에 들어가거나 직접 형성하려는 노력들이 필요한거 같아요. Seoul Creator Club의 느슨하지만 강력한 연대가 필요하신 분이 계시다면 주저없이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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