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유진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4학년 재학
안녕하세요. 저희는 수업을 2개나 같이 듣고 있지만, 형식상 자기소개 부탁해요.
안녕하세요. 저는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에 재학 중인 14학번 범유진입니다. 4학년이고,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관심이 많아요. 정의가 급변하는 것 같아서요.
먼저, 과거로 좀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디자인 과에는 어떻게 입학하게 되었나요?
그림 그리는 걸 원래 좋아했어요. 그러다 어머니가 떠보듯이 예술고등학교에 가라고 말씀하신걸 덥석 물어 예고를 다니게 됐죠. 고등학교 입학하고 미술을 더욱 좋아하게 됐어요. 미술 교과를 공부하면서 디자인 작업을 많이 접했는데, 애플의 제품이나 필립스탁의 작업을 보면서 디자인도 하나의 예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순수 미술은 저를 위해 작업을 한다고 느껴서 다른 사람에게 직접 도움이 되는 예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디자인 과를 희망했어요. 그때는 사실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 디자인 과에서 다루는 내용은 잘 몰랐지만, 막연히 사회에 연결될 수 있는 미술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디자인을 좀 일찍 접했네요. 그럼 그렇게 입학한 대학교는 어땠나요?
1학년 때는 주로 기초 실기 수업이 있었어요. 실기수업에서 손으로 그리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는데 주변 다른 친구들이나 선배들은 컴퓨터 툴로 작업하는 거에요. 부러웠어요. 그래서 툴 배우는 수업 위주로 찾아들었죠. 3학년 때부터는 배운 툴을 이용해서 이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브랜딩 수업을 주로 들었어요. 저만 좋아서 작업하기 보다는 좀 더 이유 있는 디자인을 하고 싶었어요. 브랜딩 수업에서는 어떤 브랜드를 가상으로 만들고 가치를 정해서 어떻게 보여줄지를 택하게 되잖아요. 그러면 자연스레 이유를 생각해야 하니까요. 3학년 2학기 때는 휴학을 하고 반반 스튜디오에서 인턴을 했는데, 이때 캠페인 브랜딩의 기획을 많이 접하게 된 것 같아요. 디자인의 힘도 중요하지만, 기획 때문에 프로젝트 전체가 좌지우지되는걸 보고 기획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어요. 인턴이 끝나고 스위스 치뤼히에 있는 제타데카 대학교에 교환학생을 다녀 왔어요.
저도 교환학생을 하고 싶었는데 벌써 4학년이 되어 버려서 이제 못 가는데, 대리만족이라도 하게 교환학생 다녀온 이야기 좀 더 들려주세요.
과제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고요. 다른 친구들의 작업을 열심히 봤어요. 수업도 독일어로 해서 어렵기도 했고요. 거기는 한 수업이 3~5주 단위로 진행되고, 아침부터 오후까지 매일 했어요. 모여서 교수님과 같이 얘기하고 흩어져서 자유롭게 작업하고 또 모여서 작업하는 방식으로 시스템이 우리나라와 완전히 달랐어요. 한 수업을 몰입해서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좋긴 했지만, 하루 단위로 과제 아이디어를 발전해야 하니까 좀 부담스럽기도 했죠. 그렇게 한 학기에 5개 정도 수업을 들었어요.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수업은 인포그래픽 수업과 브랜딩 수업이었어요.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단 10분간의 summery였는데 ‘로고를 만들 필요가 없다’라는 거였어요. 우리가 보통 브랜딩을 생각하면 로고부터 만드는데, 로고보다는 브랜드의 핵심가치를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풀어내는 이미지로 로고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죠. 인포그래픽 수업에서는 정보를 깔끔하고 보기 좋게 만드는 것만이 인포그래픽이 아니라는 걸 배웠죠. 심각성을 느껴야 하는 정보라면 그 작업 자체에서 심각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두 수업 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개념을 깨게 된 계기였어요.
저도 생각해보지 못한 내용이라 흥미롭네요. 지금은 저와 같이 브랜딩 수업과 사회문화적 디자인 수업, 전혀 다른 두 수업을 듣고 있는 데요. 앞의 대화를 보면 브랜딩에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사회문화적 디자인 수업을 듣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교환 학생 경험의 영향인가요?
사회문화적 디자인 수업을 들은 건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하고 싶어서 였어요. 교환학생 다녀온 경험 때문도 좀 있는 것 같아요. 들으면서 ‘내가 그동안 생각을 많이 안 했구나’ 반성하기도 했고, 브랜딩과는 접근법이 완전히 다른 점이 흥미로웠어요. 브랜딩은 이슈나 트렌드, 사회에 끼칠 유익한 영향을 찾으면 되는데, 사회문화적 디자인 수업은 훨씬 더 광범위하니까요. 연결할 수도 있지만, 저 스스로가 다르게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이 어렵네요. 제가 잘 선택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저도 전혀 다른 두 수업을 들으니 좀 혼란스러워요. 저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이유는 뭐에요?
요즘 디자인의 정의에 대해 고민하다 보니, 디자인을 안 하는 디자이너라는 말이 흥미로웠어요. 예를 들어 ‘스티브 잡스는 디자이너인가?’ 라는 주제를 생각해보면 디자인은 스티브 잡스가 아니라 조나단이 했다고 할 수도 있고, 기획을 스티브 잡스가 했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도 디자이너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꼭 이미지를 만드는 작업을 직접 해야지만 디자이너인가?’ 라는 의문이 있어요. 이 프로젝트의 대상인 디자이너가 아닌 디자인과 졸업생들도 사실 디자인을 하고 있을지 몰라요. 그래픽 툴을 이용해 무언가 만들어내지 않을 뿐인 거죠. 그런 생각을 같이 얘기해 보고 싶었어요.
어느 정도 동의해요. 저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어디까지를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의 범주로 봐야 하느냐 고민이 많거든요. 그렇다면 범유진이 정의하는 디자이너는 무엇인가요?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할게요. 여기서 말하는 가치는 사회적인 가치일 수도 있지만, 작업을 본 사람이 어떠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조차도 가치라고 생각해요. 다만, 누구나 가치를 만들어낼 수도 있으니까, ‘미적 감각을 가진’이라는 말을 붙여야겠네요. 그러면 ‘미적 감각을 가진,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네요. 미적 감각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거라서 조금 애매하기는 하지만, ‘촌스럽다’와 ‘세련됐다’를 구분할 수 있다면 미적 감각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투박하고 촌스러운 걸 보고 예쁘다고 하는 건 미적 감각이 없는 것 아닐까요? 아, 디자이너 중에 가치를 안 만드는 사람도 있는 데요. 예를 들면 수업 때 들은 이야기인데, 타이포그래피를 익혀서 식품 정보를 표기할 때 안 좋은 정보를 일부러 작게 쓰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이요. 양심 없는 디자이너죠. 나쁜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는 가치를 만들지 않는 것 같아요. 물론 디자이너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요.
나쁜 디자인이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그런 면에서 보면 디자인의 사회적 기능 혹은 역할에 대해 고민이 많은 것 같은데 맞나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해요.
디자인 잘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디자인이에요. 착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죠. 제가 어떤 일을 할지는 모르지만 제가 속해 있는 곳이 조금 더 사회를 생각하고, 사람들의 편안함, 지속가능성 등을 가치로 내세우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3학년 때까지만 해도 촌스럽다고 생각되는 디자인을 보면 바꿨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예쁜 디자인과 안 예쁜 디자인을 구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예쁜 것만이 좋은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하나의 디자인에는 역사가 있고 정신이 있는데 예쁨만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게 맞는 방향인가를 고민하게 된 거죠. 예쁘기만 한 것보다는 의미가 있는 디자인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 의미를 착한 디자인에서 찾으려 한 것 같아요. 때로는 담백한 디자인, 꾸밈없는 디자인이 더 좋은 디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디자인을 한다면 무엇을 하고 싶고, 디자인을 안 한다면 무엇을 하고 싶나요?
디자인을 한다면 브랜드 디자이너가 되어서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어요. 브랜드의 가치를 같이 만들어 나갈 수도 있잖아요. 기업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고 사회에 더 도움되는 가치를 가진 브랜드가 되게 제안할 수도 있겠죠. 그런 착한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만약 디자인을 안 한다면 공학 쪽 일을 하고 싶어요. 새로운 기술에 대해, 세상이 바뀌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공학 일을 하더라도 사회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고민하는 역할을 할 것 같아요. VR, 컴퓨터 공학, AI 등의 기술을 어떻게 사회에 녹일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실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디자인이 기술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현실적으로 공학 쪽 일을 하지는 않더라도 계속 관심 있게 지켜볼 것 같아요.
디자인 과에서 얻은 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걸 계속 찾아가게 되고, 조금은 상상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왠지 제가 쓸모있는 사람이 된 것 같고요. 그리고 세상을 넓게 보게 되었어요. 교환 학생도 갔다 오고 회사도 가보고, 회사에서 얼마나 큰 액수가 오가는지도 보고요. 다른 전공이었어도 얻었겠지만, 내용이 많이 달랐을 것 같아요. 지금은 만족하는데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지루해져서 디자인도 그만둘 수도 있겠네요.
‘안녕, 디자이너’에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디자인 과를 나왔으니 디자이너가 되라는 클리셰를 비트는 프로젝트 같아 좋아요. 돌이켜 보면 과연 어렸을 때 한 번이라도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생각할 시간이 있다거나,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시간과 환경을 주었는지 의문이에요. 학원을 가야 하고, 비교하고, 경쟁하는 구조 안에서 어떻게 자유롭게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런 고민을 대학교 때 많이 하니까 갭이어도 가지고, 휴학하며 쉬게 되는 것 같아요. 외국 유학 때 놀랐던 게 한국 나이로 27살인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미래에 대해 전혀 조급해하지 않고, 나이가 뭐가 중요해라고 오히려 되묻는 거였어요. 그런 걸 보며 시간에 쫓기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하는구나 생각했죠. 제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 고민이 많다고 했잖아요. 이 프로젝트에서 만날 사람들이 다 디자인에 한 번쯤은 발을 들여놨던 사람들이니까 결국 디자이너가 누구인가에 관해서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장이 될 것 같아요. 그 점이 가장 기대돼요. 졸업 이후 바로 다른 일을 한 사람, 디자인을 잠깐 하다 그만둔 사람, 오래 디자인을 하다가 그만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요.
2018년 4월 20일 홍익대학교 홍문관 6층 복도에서